트랜스젠더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살기 싫다_준우

 트랜스젠더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살기 싫다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아닌 것도 아닌 게 아닌 듯이 활동하기 내가 착하다굽쇼???




  개인적으로 외부 행사나 강연을 하거나 입장을 밝히는 인터뷰를 해야 하거나 긴긴 시간의 회의를 한 후 뒤풀이 자리에 가거나 간단한 상담 요청을 받거나 하기도 한다그런 자리에서 사람들이 자주특히 일 대 일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거나 질문을 받는 자리가 되었을 때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하게 된다: “근데 당사자도 아니신데 어떻게 트랜스젠더 활동을 하게 되신 거예요?” 때로는 덧붙여서 이러한 평가를 받기도 한다: “좋은 일 하시는 거 같네요.” (그중에는 “정말 착하신가 봐라는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도 한다여러분제가 착하다뇨?! 전 베리 배들리 나쁜 놈입니다~)


 게 중에 가장 설명하기 힘든 부분은 이거다. “그거 내 일이 아닌 게 아닌데요.”


 ‘남의 곤궁(?)을 내 일 같이 대하라라는 류의 관념적 도덕관에 지나지 않는 걸까그게 아니다그것만이 다가 아니다그렇다고 해서 “사실 알고 보면 나도 트랜스” 식의 수줍은 커밍아웃이냐 하면그것도 아니다당사자가 더 잘 팔리는 소수자 운동에서 당사자 코스프레를 편히 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걸까그게 전부는 아니다트랜스젠더의 일은 나의 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건 ‘내 안의 포비아를 보라라는 문구만큼이나 전달력 강한 활동 전략이긴 하지만그것이 아니다그것만은 아니다솔직히 말해서지난 수 년의 기간 동안 지금 열거한 방식으로 나 스스로의 입장을 합리화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일 것이다적당한 합리화로 그냥 착한 사람으로 행세하며 지낼 수 있었다면 차라리 맘은 더 편할 수도 있었겠다 싶기도 하다그런데 나 자신에게 참 안타깝게도그게 다가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 외에 그게 왜 나의 일인지를 잘 설명할 방도가 없으니 참으로 곤혹스러워지곤 한다.





트랜스젠더에 대해 말한다는 건 “A도 B도 아닌데 C인 것도 아니무니다의 반복 


 내가 처음 트랜스젠더 관련한 활동을 막 시작하였을 적에 습관적으로 자주 하던 표현이 있었다. “트랜스젠더 이슈는 A도 B도 C도 아닌데 셋 다 아닌 것도 아니고 셋 다인 것도 아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인가 싶겠지만이 표현은 대충 다음과 같은 대화 속에서 나타난다.


지금 말한 바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는 A라는 말인 거죠?”

근데 A인 거 만은 아니에요.”

그럼 같은 거라 봐도 되나요?”

그게... B라고만 말할 수는 없긴 해요.”

... ... (그 외의 옵션을 고민하다가그럼 C인 거네요맞죠?”

“.... C인 것도 아니무니다


 트랜스젠더에 대해 얘기를 하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무언가로 트랜스젠더를 얽고 있는 다양한 용어와 환경을 설명해야 할 경우가 많다.


 트랜스젠더의 정의가 무어냐고 물어올 때트랜스젠더/트랜스섹슈얼/트랜스베스타잇/드랙 간의 차이라든지 젠더퀴어와 안드로진의 차이가 뭐냐고 물을 때수술/비수술 트랜스젠더의 삶이 자의적 선택인지 물어올 때더 뚫기 쉬운 법원이 어디냐는 문의가 들어올 때수술 붓기가 가라앉은 몸을 보여주며 "이 정도면 (패싱그럭저럭 될 거 같지 않냐?"는 말을 들을 때게시판에서 진성/가성 트랜스에 대한 논쟁이 붙을 때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단지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인가라는 의문을 마주할 때남성적 몸과 여성적 몸은 어떠하다라는 실존적 화두와 맞닥뜨릴 때, 트랜스남성의 마초성에 대하여 비판적 평가를 해야 할 때호르몬 투여의 작용/부작용이 한결같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 때한때는 신선했던 ‘트랜스젠더 안에도 게이레즈비언바이가 있다는 말이 이제는 너무 당연히 받아 들여져서 공허하게 들릴 때트랜스젠더의 성매매에 대한 입장이 무어냐고 독촉 받을 때...


 이러한 무수히 많은 물음에 대해 “~이 아니다라고 답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딱히 정답이 없음아니 답이 하나이지 않음에서 생기는 망설임 때문일 거다그런데 중요한 사실은바로 답 없는 망설임이야말로 여전히 내가 트랜스젠더 활동에 머물러 있게 되는 가장 강한 매력 중 하나라는 거다




그래서... 이 활동 바닥에 비전은 있답디까?


 트랜스젠더 이슈는 그 자체로 ‘다양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극히 개인적인 체감에 기반한 평이긴 한데한때 트랜스젠더 활동은 화려한 악세사리다양성의 첨단에 있어서 나열된 다양성 요소들 중에서 화룡점정이 되는 무언가이던 때가 있었다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 정체성 운동에서 성적지향과는 개별적인 지형인 ‘성별정체성을 담당하는 집단이라든지의료적으로나 법적으로 좀 더 인권친화적 상황이 되기 위해 늘 전문적 도움이 연대할 필요가 있는 대상이던 때이다. (지금 와서 보면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을 것도 같지만몇 년 전하고만 비교해도 지분(?)은 많이 커진 거 같다는 체감을 하곤 한다.) 


 근데 사실은 외부에 비춰진 정도보다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트랜스젠더 이슈 안에 녹아있다. (다른 영역(?)에서의 활동들도 그러하겠지만,) 트랜스젠더 이슈 안에서도 각각의 입장과 주제들은 때로/상당히 자주/어쩌면 필연적으로 대립하거나 충돌하거나 양립불가하기도 하다수술과 비수술 이슈가 그러하고법적 신분 상의 성별변경이 개별 주체의 행복권과 연결됨과 동시에 사회적 성별 규정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협상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남자다움/여자다움을 비롯한 성별성에 대한 논란에서 트랜스젠더는 ‘성별성이 선험적으로 있는 거다라는 데에 대한 존재증거로 소환되곤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트랜스젠더들은 과장된 성별성을 발현함으로써 이분화되고 차별적인 성별성을 재강화하는 데 기여하는 문제적 존재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병역 과정에서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부당한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현 사회의 군대를 둘러싼 여러 문제와 쉬이 만나지 못한다 (이는 운동 영역의 역량상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제 3의 성별을 제도적으로 허용할 것인가라는  (아직은 머나먼논란은 트랜스젠더와 젠더퀴어안드로진바이젠더 등의 존재와 정체화 명명의 소유권을 두고 분쟁하며 성별정체성이라는 영역에서의 헤게모니적 대립각을 만들기도 한다성별변경에 관한 특별법은 아무런 제도적 장치가 없는 현 상태에서 그 필요성이 절실히 제기되지만 또 한편으론 성전환의 요건을 규율하고 제약할 위험 또한 다분하다는 우려도 공존한다앞으로 ‘비이성애 and/or 비유성애이며 또한 트랜스이기도 한 존재들은 이성애 유성애 집단과 새로운 싸움을 해나가야 할는지도 모른다(진성/가성 트랜스 논란을 보라그리고 트랜스젠더의 성적 욕구는 과장되어 얘기되거나 아예 언급되지 않는지를 보라!).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 사이에는 겪어 나가야 할 삶의 경험이 다르기에 필연적으로 다른 입장을 갖게 되는 간극이 있는데, 이 간극은 바이오 남성-여성 간의 성차별적 상황과 닮은 듯하면서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때때로 만나지 못한다이걸 한 문장으로 퉁치자면(위험하게스리!), 트랜스젠더는 너무나도 복잡다단하다. ‘이게 정답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건 틀린 답이 되리라...랄까?


 그런데 적어도 수 년 전이라면 통했었을 엄브렐러 텀(umbrella term, 굳이 번역하자면 ‘포괄어)으로서의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는 오늘날 더 이상 예전만큼 활동적 측면에서 유의미한 효과를 만들지 못하는 용어가 되어가는 추세인 거 같다이건 트랜스젠더라는 말이 생물학적으로 혹은 사회 시스템 상 지정된 남성/여성 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성별적 존재들을 다 아우르는 단어가 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말해지는 분기점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동시에 트랜스젠더 존재 그 자체에 줄곧 비판적 논조로 씌워져 온 이미지는 여전해 보인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 자체는 필연적으로 성별이분법으로 귀결되거나 때때로 성별역할-남자는/여자는 이래야 해-을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유지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 말이다트랜스젠더는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기존의 성별을 초월하여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선구자적 존재도 아니며사회적 성별 담론의 근본(만약 그런 게 있다 치면)을 전복하는 전략도 아니게 되었다고 여겨진다나아가 쪼오끔 별다른 주체가 다른 방식으로 행하는 거에 불과할 뿐 기존 성별적 속성들을 반복하면서 그 속성들을 강화하고 본질화하는 방향을 더욱 견고히 하는 효과를 야기한다는 거다


 이같은 흐름에서트랜스젠더는 점점 더 공식화된 언어로서만 유통될 위험이 있다다양한 이야기는 규정되고 공식화되어야만 할 그 무엇이 되어가게 된다그럼으로써 트랜스젠더의 서사는 점차 축소되어 제도적이고 의료적인 규범에서만 공식적으로 논의될 위험이 있어 보인다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여전하다는 게 현실 상황이면서도 동시에트랜스젠더는 시혜적 대상이자 규율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시선이 트랜스 운동을 옥죄어 올 수도 있겠다. (사실 최근에야 새로이 나타난 현상이라기보다는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요즘 들어 점점 더 노골화되는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역설적으로트랜스젠더란 단어는 앞으로 점점 더 잘 팔려나가게(?) 될 거 같다물론 이걸 수면 아래의 존재가 가시화되고 제도적 지원을 받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라 볼 수도 있긴 하다.


 그런데 계속해서 느껴지는 위화감은 뭘까트랜스젠더를 위하는 공식 창구가 넓어지는 건 반가운 일일 텐데 무엇에 부대끼는 걸까아직까진 막연한 답이긴 하지만그건 아마도 욕망이 공식화되면서 생길 수밖에 없는 간극 때문일 거 같다그 사람이 민증 번호가 바뀌면서 기뻐하는 건 과연 민증 뒤 번호의 숫자 변화 때문만일까수술로 변한 몸에 만감이 교차하는 건 수술 그 자체 때문일까서류에 쓰인 숫자가 1(또는 3)인지 2(또는 4)인지가 최종 승인인 것처럼 얘기되고수술된 몸이 정말 완벽한(?) 남자 몸이냐 여자 몸이냐고 얘기되는 동안에 우리는 말해지지 않아왔고 말할 수 없었던 수많은 욕망과 감정을 놓치고 흘려버리는 건 아닐까그 안에는 숱하게 많은 고민과 협상과 좌절과 만족의 합리화와 포기와 투쟁이 있을 터다많은 이의 삶이 그러하듯 모순 속에서도 살아남아가는 이들의 삶이 문자와 규정으로 범주화되고 정의 내려지기 때문에 박제를 보는 듯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걸 거다이 위화감은 나에겐 동력이 된다그 지점은 분명히 여전히 내가 답을 못 찾고 있는 “그래서 이게 왜 내 일일 수도 있는 건데?”란 질문에 막연하기 짝이 없으나 답을 찾을 힌트가 되리라.





이제 트랜스젠더 단체가 만들어지면 밀물 같이 밀려올 요청들 "다 해주세요!!"... 못 해안 해!


 이제 트랜스젠더 단체가 만들어지게 된다면아마도 그 단체에는 트랜스젠더에 조금이라도 관련되었다고 보이는 그 모든 이슈에 관해 관여하거나 활동할 것을 요구 받을 것이다지난 몇 년 간 관련 단체가 없었던 환경이기에 그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는 걸 수도 있겠고요즘의 분위기에서 트랜스젠더는 나름 잘 팔리는 이슈이다 보니예전보다 그 요구는 더더욱 많아질 게 뻔하다.



 “근데... 다 할 수 없다다 하기도 싫다.” 

 이게 정답인 거 같다물론 단체로서의 활동을 한다는 것에는 전문성을 필수적으로 요하는 영역도 존재한다해당 활동가는 그 영역에 있어서 누구 못지 않은 전문가가 되어 있어야만 하기도 한다그러한 기대를 갖고 섭외해오거나 도움을 찾아오는 사람도 분명 많이 있다그치만 안타깝게도... 그 기대를 모두 충족시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하며적절하지도 않다고 본다


 조각보는 트랜스젠더 단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이지만조각보를 거쳐갔고 함께 하는 구성원 모두의 생각이 다들 한결같지는 않았을 것이다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다각자가 우선순위로 두는 사안이 다를 테고삶의 가치관이 다를 거며 각자의 실존적 상황도 다르니 말이다모순되고 충돌하기도 하는 주체들의 움직임이었다면 과장이려나그런데 어쩌면 그게 트랜스젠더 활동의 특이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종종 든다.


 현재 시점에서 활동의 역량이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모든 걸 다 포괄할 수 없다면각자의 지향점 역시 다르고 그래서 충돌되는 여러 이슈를 다 하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기까지 한다면무엇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개인적으로 나는 그 모순을 강점으로 만드는 활동을 해보고 싶다조각보 프로젝트를 통해 태어날 단체가 명확한 목표를 가리키는 나침반을 탑재한 배가 되기보다는 비빔밥처럼 난잡하고 방향도 입장도 없는 듯하여 매우 걸음이 느리더라도 그 모순됨을 안고 가는 플랫폼이 되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단체가 만들어질지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의는 계속되어가겠지만개인적인 바람으로는 다음의 화두만은 꼭 가져가고 싶단 생각도 갖는다[트랜스젠더로서의 지속 가능한 삶지난 3년 간의 조각보 활동을 통해서 발굴해 낸 이슈 중 가장 중요하고 ‘이거라면 계속 해나가도 되겠구나’ 싶었던 거리는 바로 트랜스젠더로서의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이슈를 발굴했을 때였다트랜스젠더들은 정체화를 시작하고 의료적으로나 법적으로 필요한 시기에 수면 위로 나오다가도그 과정이 끝나면 마치 전환 자체가 종료라도 된 것처럼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또한 왠지 트랜스젠더 활동은 당사자들의 이 전환을 어떻게 서포트(?) 해주고(!) 이들이 좀 더 안녕하고 행복할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갈 수 있게끔 할 것인지에 치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강박에서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기도 하다의료와 제도는 트랜스 운동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화두일 거다그리고 많은 실천이 이 영역에 집중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해가 갈 수록 이에 대한 트랜스젠더들의 요청도 늘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놓치고 있던 중요한 점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당당히 되물을 수 있는가 일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 전환했나가 그렇게 중요해?”

의료적 조치를 원하냐 안 원하냐로 진정성을 따져?”

일상 곳곳에서 맞닥뜨리는 억울함과 울적함은 숙명이니 참아야 해?”

연애하고 싶고 가족을 이루고 싶고 애 낳고 싶은 욕망은 있으면 안돼?”

트랜스젠더는 안 늙는 줄 알아?”


 만약 호르몬과 수술을 했냐/하고 싶나 여부가 진짜 트랜스를 구분 짓는 척도가 아니라면그리고 민증의 뒤 번호를 바꾸는 게 마냥 저냥 행복한 피날레가 아니라면어쩌면 트랜스 운동은 이런 가시적 전환이 우선순위라는 입장과도 과감히 싸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그러면서 트랜스의 삶은 지속될 수 있어야 하겠다이 화두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행복하게 삶을 살아갈 당위를 가진 존재로서함께하는 이들과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러면.... 나는 지금 어디 서 있나?


 그러면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 트랜스젠더 활동가로 산다는 게 별거 아니다답도 안 나오는 저런 질문들을 하고 답하고 다시 물으며 사는 거지.





사람보다 고양이와 말이 더 잘 통한다 우기는 준우